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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 리뷰/나노하의 리뷰는 리뷰다

리뷰는 리뷰다 - 길티 크라운


시장경제의 침체로 모에 코드로 인한 안정화를 미덕으로 삼는 00년대와 달리 10년대는 반대로 다양한 컨셉의 작품들과 연출들이 실험적으로 행해지는 시기였다. 때문에 필자가 기억하는 10년대 초는 그야말로 다산다난한 해였다. 좋은 의미로 화제가 된 작품이 있는 반면, 나쁜 의미로 화제가 된 작품 역시 유달리 많았는데, 길티 크라운이 가지고 있는 작품에 대한 개인적인 이미지는 후자였다.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시청자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는 작품들이 가지는 공통분모는 시청자들에게 상당한 기대를 받고 있다는 부분이다. 그만큼 작품에 대한 시청자들이 요구하는 조건이 높으며, 이 조건을 충족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서 희비가 엇갈린다. 길티 크라운의 카키 테츠로 감독은 00년대부터 꽤 인상적인 작품들을 선보여왔고, 프로덕션 I.G 역시 지속적으로 작품을 제작해오면서 인지도를 높인 제작사이며, 여기에 카야노 아이를 중심으로 한 걸출한 신인 성우진들까지 가세했다. 그런 의미에서 길티 크라운은 상당히 좋은 조건을 가지고 출발했으나, 시청자들이 요구한 골에는 도달하지 못한 케이스라고 볼 수 있겠다.

 

길티 크라운은 기본적으로 세기말적인 배경을 다룬 SF 액션 장르에 가깝다. 인간의 생존을 위협하는 질병이 있고, 거기에 연관된 두 계층들이 대립하는 과정을 그리는 이 작품은 기본적인 장르적 재미에는 충실하다. 액션 연출의 평가기준이 되는 동적 연출을 근래에 봤던 작품중에서 상당히 우수한 편이며, 꽤 그럴듯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여러 가지 복잡한 설정들을 엮어놓긴 했지만, 뚜껑을 열어보면 갈등 구조는 명확하고 큰 사건들을 기준으로 시청자들의 몰입감을 이끌어내기 쉬운 구조를 취하고 있다.

 

   



다만, 여기서 이 작품은 단순 액션 장르에서 그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스토리텔링에 힘을 실으려고 하는데 여기서 톱니바퀴가 맞물리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는다. 세계의 종말과 최후의 심판이라는 묵시록이라는 컨셉에 이것을 막으려는 한 명의 소년이라는 내용은 마치 구약성서의 내용 일부를 옮겨온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여기까지는 좋지만, 이 작품의 전반적인 문제점은 쓸데없는 군더더기가 너무 많고, 자신이 내세운 설정을 손바닥 뒤집듯 너무나 쉽게 바꿔버린다는 점이다. 갈등 관계는 명확하지만, 그 외에 전개에 필요하지 않은 요소들이 지나치게 많고, 이런 요소들이 작품의 몰입을 방해하고 플롯을 허술하게 만든다. 등장인물들은 갈등 관계를 쉽게 만들고, 쉽게 허물어버리며, 갑자기 기뻐했다가, 갑자기 분노하고, 이런 상황에서 왜 이런 행동을 했는지에 대한 이유를 명확하게 제시하지 않는다. 때문에 많은 사건들이 뜬금없이 일어나고, 어이없는 형태로 해결되며, 그걸 본 시청자들이 납득하지 못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결과적으로 길티 크라운은 우리가 소위 말하는 묻지마전개의 단점을 고스란히 들고 오고 있는 셈이다.

 

묻지마 전개는 분명히 플롯 완성도를 해치는 주범은 맞지만, 길티 크라운이 마이너스 요소로 작용하는 이유는 전개 방법 그 자체에 원인이 있는 것은 아니다. 풀어서 이야기하자면 방법론적인 문제다. 만약 이 작품이 단순히 액션에 힘을 주는 작품이었다면 플롯은 어디까지나 부가적인 요소로 남을 수 있었다. 다만, 길티 크라운의 경우 액션보다는 스토리텔링 자체에 힘을 실으려는 경우 이런 종류의 전개가 단순히 부가적인요소로 평가될 수 없다는 데에 있다.

 




결론을 이야기하면 길티 크라운은 당신이 여태까지 들어온 온갖 과장섞인 평가와 달리 그냥 평범한 작품이다. 다만, 평범하다고 했지. 그게 아주 형편없다는 뜻도, 반대로 우수하다는 뜻이 아니다. 단순한 오락용 작품으로서는 꽤 즐길만하지만, 기대 이하의 플롯완성도와 구멍 뚫린 설정 때문에 단순히 킬링타임 그 이상 그 이하의 의미를 갖지 못한다. 액션 연출은 훌륭하지만, 그 연출이 존재하는 이유가 사라진 탓에 일회적인 액션들이 나타났다 금새 휘발 될 뿐이다. 길티 크라운은 그래서 부담이 없이 볼 수 있고, 그래서 남기는 것도 없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