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이 글의 주제일지도 모릅니다
1.
‘TEAM SBT는 Subculture Team의 약자로, 주류 문화가 아닌 서브컬처 문화를 향유하는 리뷰어들의 모임입니다.’
SBT에 끌려오게 돼서 제일 먼저 깨달은 것은 별로 쓸 글감이 없다는 것입니다. 애니메이션은 더 날카롭게 분석하시는 분들이 많고, 라이트노벨은 거의 손을 안 대다시피 하고... 음악이나 영화는 잘못 건드렸다간 제 명이 짧아질 것 같고... 글감에 대해서 고민고민을 하다가, 문득 눈에 들어온 SBT 소개글의 ‘서브컬처’란 단어에 시비를 한 번 걸어보고 싶어졌습니다.
2.
‘망가, 애니메이션 등 도쿄의 서브컬처를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는 그는...’
(한국일보, 2013.10.28., ‘슈에무라와 다카시 무라카미의 파격적인 만남’)
‘청소년처럼 보이는 캐릭터의 시각적 판타지를 모조리 금지한 아청법 2조 5항. 취지는 좋은데, 서브컬처 소비자들이 들끓는다.’
(한겨레, 2012.12.15, ‘쥐 잡다가 미키마우스까지 잡겠네’)
언제부턴가 일본의 만화, 애니메이션, 라이트노벨, 게임, 일러스트 등의 시장을 향유하는 집단, 즉 오타쿠 집단에서는 자신들을 드러낼 때 서브컬처라는 단어를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트위터와 블로그 프로필에는 자기가 서브컬처를 좋아함을 외치고, 동인그룹과 관련 매체들은 자신들이 국내 서브컬처를 주도함을 내세웁니다. 언론에서도 오타쿠 문화를 가리킬 때 서브컬처라는 단어를 쓰기 주저하지 않습니다.
3.
문화인류학이니, 이데올로기니하는 원론적인 이야기는 글이 질질 끌어지니 생략하겠습니다. 엄연한 의미에서의 서브컬처는 다음과 같은 공통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A. 'Sub', 주류가 아닌 비주류
B. 문화 구성원들의 탈사회적인 가치체계 공유
C. 독자성을 통해 상위 문화에 상향적 영향
이를 오타쿠 문화에 비추어 직접 판단해주시길 바랍니다.
A. 오타쿠 문화는 문화산업과 향유층의 규모를 고려해보았을 때 비주류라고 부를 수 있나?
B. 오타쿠 문화의 구성원들은 기존 사회 문화의 헤게모니에 반하는 공통적인 사상이나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나?
C. 오타쿠 문화는 그 고유한 특징으로 기존 주류 문화에 영향을 충분히 미쳤나?
4.
읽는 분마다 위의 질문에 전부 긍정하시는 분도 계실 것이고, 반대로 전부 부정하는 분도 계실 겁니다. ‘아니, 그건 엄밀한 학술적인 의미에서의 서브컬처를 말하는 거고.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건 그게 아니잖아.’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맞습니다. 하지만 저는 오타쿠 문화가 서브컬처냐, 아니냐를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타쿠 문화라는 의미로 서브컬처라는 단어를 쓸 때, 서브컬처라는 단어의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고 있었냐는 것입니다. 또한, 설령 오타쿠 문화가 서브컬처에 속한다고 해도 서브컬처가 곧 오타쿠 문화인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서브컬처에는 히피문화, 펑크문화 등 무수히 많은 문화가 포함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흔히 이 두 어휘를 동치인 양 사용하곤 합니다.
5.
사실 서브컬처라는 단어가 오타쿠 문화를 직접적으로 가리키게 된 것은 일본 학계가 발단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90년대 중후반부터 일본 철학계, 문학계, 그리고 사회학계에서는 자국의 오타쿠 문화를 분석하려는 연구가 이루어졌습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미야다이 신지, 아즈마 히로키, 무라카미 다카시 등을 들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그 연구가 논문, 인터뷰, 그리고 도서 등의 여러 매체 등을 통해 대중에게 알려졌고 오타쿠 층 또한 그에 관심을 보였습니다. 당연하게도 학계의 오타쿠 문화를 향한 시선은 곱지만은 않았습니다. 이에 따라, 2ch 등 일웹 등지에서 학계의 태도에 대한 불만을 터트리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서브컬처라는 학술적인 단어가 오타쿠 문화라는 의미로 혼용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비틀어진 의미에서는 학술적이면서도, 어느정도 경멸조도 담기고, 자조적인 의미도 띄고 있는 단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6.
“그래서 뭐, 서브컬처라는 단어를 잘못 사용하고 있으니까 쓰지말라고?” 아뇨, 뭐... 그냥 쓰세요. 어원이 어떻든 우리나라와 일본에서는 그래도 아는 사람들끼리는 의미가 통용되니까 안 쓸 이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이 글을 마치면서, 저 스스로도 자주 썼던 용례였던 만큼 ‘나는 내가 즐기는 애니메이션, 만화 등의 오타쿠 문화를 있는 그대로 내보이지 못하고 서브컬처라는 단어로 그저 예쁘게 포장했던 것 아닐까’하는 자문을 던져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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